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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용문(登龍門)’
등용문은 출세를 뜻한다.
출세는 원래 ‘세상에 나간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조정, 정부, 관직, 임금의 부름’을 뜻한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는 ‘정부 관리’가 된다는 말이지만 하급공무원은 아니고 5급 공무원 이상을 예상하면 비슷할 것이다.
‘등용문’이란 이름의 입시학원이 널려있고, 고시생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치고 ‘등용문’의 뜻을 모르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등용문’을 의미하는 여러 형태의 그림들을 부적처럼 이부자리에 깔고 자거나 지갑에 넣어 다니는 사람도 많다.
‘등용문’에 관한 그림이나 부적은 한국, 일본, 중국(대만) 같이 입시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유행한다.
등용문이 출세를 의미하게 된 것은 중국 황하의 거친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잉어의 모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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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변성룡도’는 ‘등용문’, ‘약리도’ 따위의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거센 물살과 잉어의 표현은 거의 동일하지만 경우에 따라 여의주, 해, 괴석, 모란, 연꽃과 함께 그려진다.
여의주를 그린 것은 용이 된다는 의미이고, 아침 해를 그린 것은 아침 ‘조(朝)’와 정부를 뜻하는 ‘조정(朝廷)’의 ‘조’와 글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조정에 나간다. 곧 출세’를 뜻한다. 모란을 함께 그리면 ‘출세를 하여 부귀를 얻는다’라는 뜻이 된다. 또한 두 송이의 연꽃과 두 마리의 잉어그림은 과거시험인 초시(初試)와 진사(進士)를 연달아 붙어 관직에 나간다는 의미이다.
초기의 등용문 그림은 고사에 충실했으나 점차 해와 모란, 연꽃이 결합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주되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
잉어가 뛰어 오르는 지점에 ‘용문(龍門)’이란 이름을 가진 문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과 연관시켜 잉어가 용으로 변한다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잉어의 모습은 마치 알을 낳기 위해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비슷하다.
물줄기의 흐름에 반대로 헤엄쳐 올라간다는 것은 팔자를 바꾸는 일만큼 어렵다.
어찌 보면 자연의 흐름에 맞지 않는 일인데, 그만큼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공부를 곧잘 한다는 예쁜 조카가 있다.
가끔 명절 때 만나면 이렇게 말한다.
“너, 심심해서 공부하지? 공부를 너무 잘하지 마라. 중간 정도가 딱 좋다.”
조카는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공부 잘하면 고작 공무원이 되는 게 전부다. 그리고 서울대 따위의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정치인이 되는 것도 문제다. 왜냐하면 이렇게 공부를 잘해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망치고 남의 삶을 망치고 자신의 삶마저 망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어린 조카가 이런 사회적 문제를 이해할 리는 없겠지만 조선시대의 ‘출세’는 관리가 되어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검사나 판사가 되어 올바른 사법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이 찾기 어렵고, 애국 애족하는 정치인을 만나기 어려우며, 노동자와 상생의 기업문화를 만들어가는 기업인도 보기 드문 현실이다.
현대인들에게 출세는 그저 돈을 많이 벌어 펑펑 쓰는 일과 같은 말이다.
어떤 성자는 태어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출세’라고 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그 존재 자체가 바로 출세라는 말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생명은 ‘출세’한 존재들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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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규섭/등용문/디지털민화/2012. [자료사진 - 심규섭] |
이 그림은 등용문이란 제목의 민화를 변주하여 그렸다.
거친 물결과 뛰어 오르는 잉어, 그리고 여의주라는 구성은 같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해 더하거나 뺐다.
사실, 민화에서 원화를 기반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다양하게 변주하는 일은 허다하다.
또한 잉어라는 물고기의 생태적 상징을 이용하거나 다른 요소를 결합하여 복합적인 의미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가끔 어떤 미술이론가는 원형으로부터 변형된 것은 모두 무식의 소치이거나 낮은 수준이라고 일갈(一喝)하지만 나는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이 더욱 문제라고 생각한다.
민화의 원형이 청나라에서 왔던 아니면 우리 고유의 전통에 의하든 관계없이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하여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것만이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등용문 그림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어변성룡’이란 개념과 화려하게 빛나는 ‘여의주’이다.
‘여의주’는 용(龍)만이 가질 수 있는 보물이다.
‘어변성룡’은 한마디로 팔자, 즉 운명을 바꾸는 일이다.
그림에서는 잉어의 얼굴부분에 반짝이는 여러 문양을 넣어 용으로 변하고 있는 순간을 표현했다. 또한 몸통의 지느러미가 날개로 변한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등용문’그림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가 있다.
해석하기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되기도 한다.
‘여의주’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물건이자 이상적인 세상을 뜻한다.
단순하게 그림을 해석하면 ‘잉어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품는다’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먼저 바뀌고 난 다음 세상을 바꾼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는 잉어가 용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유가 빠져있다.
오히려 여의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용으로 변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나는 원칙적으로 사람의 팔자나 운명은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사람은 타고난 팔자와 운명대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지 않고, 호랑이가 육식을 하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자연에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 이것을 ‘생태’라고 한다.
저마다의 타고난 본성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는 일은 자연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다.
가끔 서점에서 미국식 처세술에 관한 책들을 보게 되는데 온통 ‘변하라, 바꿔라’는 말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이 나약하고 게으르며 무식한 잉어에서 똑똑하고 세상을 아우르는 용으로 변신하라는 말일까?
그것보다는 탐욕과 자본과 소비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적응하라는 압박이거나 지침서일 것이다.
사람의 인간적인 욕망은 거세하거나 억누를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그 과정에서 창조성이 발현된다.
잘 살고, 잘 먹고, 장수하면서 존경받고 자녀를 낳아 키우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
사람이 자연과 합일하는 것은 자연에 대항하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그것이 삶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는 것은 생명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풍족한 삶을 만들기 위함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억압받았던 조선말기, 백성들은 ‘어변성룡도’를 보면서 세상이 바뀌기를 열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근현대사가 증명하듯이 개천의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고 힘든 세월을 인내하면서 세상은 조금씩 변화했다.
언젠가는 ‘미운 오리새끼’라는 동화처럼 잉어가 아니라 원래 자신의 존재가 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빛나는 여의주를 물고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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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아빠 |
2014/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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